역사 속으로

[스크랩] 서양의 건축 양식

시골아이! 2006. 4. 13. 20:44
 

건축 양식

서양

도리아식 (DORIC ORDER)

가장 단순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며 남성적이다.

이오니아 건축과 코린트 건축을 합친 세 건축양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로 도리스(도리아)인이 살던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시작되어 본토 각지 및 이탈리아 남부, 시켈리아(시칠리아)에 전파하였다. 건축상의 특징은 기둥이 굵고 주초(柱礎)가 없으며 주두(柱頭)는 얕은 사발 모양을 한 주관(柱冠:echinus)과 네모진 모양의 판관(板冠:abacus)으로 되어 있다. 기둥의 높이는 대략 직경의 4.5~6배, 주신(柱身)에는 세로로 16~20개의 도랑[圓溝]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은 차차 가늘어지면서 엔타시스(entasis)라는 불룩한 부분이 있다. 또한 주신 위의 장식대(裝飾帶:frieze)에는 주로 부조로 된 메토프와 세줄 홈 무늬의 트리글리포스가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간소하고 힘찬 취향은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에 비해 그리스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축실례

- 아테네의 파르테논(Parthenon)신전[B.C 447~432]


이오니아식 (IONIC ORDER)

우아, 경쾌, 유연한 느낌을 주며 여성적이다.

이오니아인들이 살고 있던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생긴 양식으로, 형식은 도리스식과 거의 비슷하다. 도리스식이 묵직하고 장중하며 단정한 데 비해, 이오니아식은 기둥이 높고 가늘며, 세부에 걸쳐 조각 장식이 많이 있어서 경쾌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예로부터 대체로 도리스식은 남성에, 이오니아식은 여성에 비유되었다. 기둥과 기단 사이에는 아름다운 주초(柱礎)가 끼워져 있고, 2개의 소용돌이 무늬를 연결한 특유한 기둥머리[柱頭]를 가지고 있다. 기둥 위 제일 아래의 하대(下帶)는 수평으로 삼분(三分)되어 있고, 중간대(frieze)는 트리글리프와 메토프 대신에 두루마리 그림 모양의 연속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다.

*건축실례

- 아테네의 니케 아프테로스 (Nike Apteros)신전 [B.C 426


코린티안 식(Corinthian order)

BC 4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나타난 건축미술의 새로운 기법이다. 기둥머리[柱頭]는 원뿔형을 가운데서 잘라 뒤집어놓은 모양이며, 그 표면에 아칸서스의 잎과 덩굴이 얽힌 모양을 조각했다. 그 이외의 부분의 구성은 이오니아식과 거의 같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변화가 보인다. 전체로서는 이오니아식에 비해 한층 더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 그 특징이다.

*건축실례

-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Olympieion)신전 [B.C 174]



로마네스크 미술 ( Romanesque Art )

  고딕 미술에 앞서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하였던 미술양식.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950~1200년경에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과 프랑스에서 일어나 유럽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서 지역마다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로마네스크 건축이 로마 건축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뜻에서 프랑스어로 󰡐로망󰡑이라는 어휘를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로마네스크 미술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서 하나의 독자적이고 뛰어난 원리를 지닌 미술양식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 로마네스크 미술이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7~8세기의 준비기간이 소요되었는데, 이것을 프레 로마네스크라고 한다. 서유럽은 옛날 켈트 문명의 발상지로서 BC 1세기에 로마 문명이 들어왔고 얼마 후에는 그리스도교의 분교(分敎)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게르만 민족 등이 동방에서 침입해왔는데, 이들도 그리스도교로 동화되었으며, 5세기 말부터 프랑크족의 메로빙거왕조를 중심으로 서유럽의 기초가 잡혀갔다. 미술면에서는 켈트․게르만계의 추상적 미술이 그리스도교에 수용되는 한편 고대 로마의 전통과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아 구상적․인간주의적 미술도 차차 들어와 카롤링거왕조 때에는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위와 같은 여러 유산(遺産)을 종합하여 매우 대담한 창작에 의한 종교적 감정의 표현을 의도한 것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10세기 말 이후 유럽의 여러 곳으로 급속하게 퍼져 1100년을 전후하여 그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 건축양식 외에 다른 두드러진 경향은 찾아볼 수 없다. 각 지방의 건축가들은 한정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환경의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온갖 창의(創意)를 한데 모았다. 󰡐황제의 돔󰡑이라고 일컫는 슈파이어․보름스․밤베르크 등의 독일 성당은 3랑식(三廊式)으로 이중내진형식(二重內陣形式)을 즐겨 채택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평활(平滑)한 정면을 갖춘 3랑식․ 5랑식의 바실리카 형식 등이 많다. 곧 로마네스크 건축은 지역에 따라 거의 한결 같이 일정한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결국 종합해 보면 벽면은 크고 창문이 작으며 중량감이 있다. 외관은 토스카나파(派) 등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단순․소박하고, 내부는 열주(列柱)나 아케이드( 열주(列柱)에 의해 지탱되는 아치군(群)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 공간 )등의 건축적 효과가 어두컴컴한 공간에 신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곳곳에 수도원의 건축이 활발하여, 정사각형의 회랑 (回廊, 사원(寺院)이나 궁전건축에서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을 중심으로 성당과 기타 여러 부속 건축물을 갖춘 훌륭한 수도원이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북부, 독일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많이 남아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엽까지 목조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nave:本堂)의 천장을 석조궁륭(石造穹:vault)으로 바꾼 점에 있다. 목조천장도 라인란트 등지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석조궁륭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신(神)의 집으로서 불연성(不燃性)의 항구적인 건물이 바람직하였을 뿐 아니라 석재공간으로서의 통일성이 생기고 또 음향적인 효과를 높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석조궁륭은 절단면이 원칙적으로 반원 아치이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창문이나 입구기둥 사이의 들보 사이나 처마 밑부분에도 이 반원 아치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건축을 반원 아치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아치의 만곡부(彎曲部)는 똑같은 석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채꼴의 절석(切石)으로 조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절석의 압력관계는 상하가 아니고 경사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반원궁륭의 기부(基部)에서는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횡압력(橫壓力)이 작용한다. 궁륭이나 아치는 로마시대에 이미 나타났으나, 이 시대에는 강력한 시멘트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보는 긴밀한 역학적 배려가 요구되지는 않았다.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의 가장 큰 과제는 아치의 집합체인 궁륭과 그 중량을 비스듬히 하거나 수직으로 받는 측벽(側壁)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있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측벽을 두껍게 만들어서 양 압력을 버티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벽이 견고하려면 채광을 희생시키고 창문을 작게 만들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경사진 횡압력의 방향을 되도록이면 낮춤으로써 또는 궁륭의 중량을 측벽의 일정한 부분에 집중하게 하고 그 부분을 또 하나의 부벽(副壁)으로 외부에서 보강함으로써 건축의 안전도를 높여 창문도 크게 마련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즉, 횡압력의 방향 낮추기는 첨두궁륭(尖頭穹)의 설계로, 또 중량의 한 지점 집중은 교차궁륭(交差穹)의 구축으로 실현되었다.


고딕양식

  고딕 건축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도 특징할 만하다.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 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고딕양식이 그 돌파구를 여는 것은 성당건축에서인데, 건축가들에게 최대의 난제가 된 것은 점차로 높이를 더해가는 석조궁륭의 가구법(架構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시는 하늘과 좀 더 가깝게 올라가기 위하여 높은 첨탑을 원하고 높은 천장을 원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상의 안정을 확보하면서 상승성(上昇性)을 유지하는 형태를 나타낸 것은 리브(늑골상 아치)궁륭과 첨단(尖端)아치이다.

  고딕식 성당 건축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구조 기술상(構造技術上)의 3요소(要素),즉 지골궁륭(支骨穹:ribbed vault)․버팀도리[飛樑:flying buttress]․첨두아치(尖頭 arch)에 단적으로 보인다. 이것들의 조직적인 적용으로 말미암아 형태에 있어서는 앙고성(仰高性) 또는 상승감(上昇感)이 강조됨과 함께, 구조상에서는 사압력(斜壓力)이 크게 경감(輕減)된다. 이 3가지 요소는 이미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있었다. 이런 것은 동방 기원(東方起原)임이 틀림없다. 12~13세기 북프랑스의 한 건축가는 이 가구(架構)에 편리하고 강한 궁륭(vau1t)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이것을 제1전제(前提)로 해서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차례를 따라 새 양식의 실현을 추진해 나갔다. 이렇게 새로운 성당 건축형식은 합리적인 탐구와 실제적인 기술적 수련을 쌓아서 실현된 것이다.

  고딕 건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과제는 벽체의 양괴성(量塊性)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벽체는 엷어지고 창의 면적을 확대해 갔으나, 이 취약화된 벽체를 역학적(力學的)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지골궁륭을 적용하였다. 이 구조에 의하면 궁륭의 무게가 지골(支骨:rib)에 의해 지주(支柱)에 집중되기 때문에, 벽체는 거의 중량을 받지 않게 된다. 더욱이 외벽에는 벽에 따라 부벽(扶壁:buttress)이 줄지어 서 있어서, 지주에 걸리는 사압력(斜壓力)을 외부에서 받쳐주고 있다. 또 궁륭․입구․창 등에서 로마네스크에서는 반원형 아치를 썼지만, 고딕에서는 첨두형 아치를 쓰게 되어, 첨두의 각을 넓히거나 좁혀서 넓이와 높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성당 안의 공간 구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리브궁륭은 밀라노의 성암브로지오성당과 잉글랜드 북부 다람 대성당의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최초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북프랑스로 전해져서 12세기 전반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교차궁륭의 양선(梁線)에 이어서 대각선을 이루는 리브는 궁륭의 중량을 분산시켜 이것을 지주로 유도함으로써, 벽체에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줄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첨두아치를 사용한 건축디자인은 이슬람건축에서 그 원류(源流)를 찾을 수 있는데, 이슬람의 영향 아래 조영(造營)된 시칠리아섬과 남이탈리아의 성당건축이 매개가 된 것인지, 혹은 십자군이 가져온 것인지, 그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12세기 중엽에 이미 지골궁륭의 합리적 적용, 높은 비례의 복합주(複合柱)나 창, 내진회랑(內陣廻廊)의 해방된 공간 등, 고딕적 건축사고(思考)가 이미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엔 로마네스크적인 점이 적지 않아, 과도기적 성격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때의 미술을 초기 고딕 미술이라고 한다. 13세기에서는 고전적 고딕 성당들이 지어졌다. 건축가들은 또 궁류형 천장의 아치들을 지탱하는 데 아치만으로도 충분함을 알게 되어 기둥들 사이의 무거운 석벽을 없애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창문들은 수직으로 위쪽은 뾰족아치로 아래쪽은 수평인 모양으로 길게 수직으로 연이어나게 되었고 창문바깥쪽으로 무게의 압력이 전달되게 되므로 벽이 기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둥이나 창문 벽들은 상하로 수직적이 매우 강조되게 되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엄청난 높이의 수직선의 다발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들게 만들고 경건한 마음을 들게 하였다.

  여기에 외부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뾰족아치를 사용하므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이 가능해졌다. 성당의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진다. 이것으로 성당의 정점의 높이의 조절이 자유로워 졌으며 고딕의 특징은 첨탑과 공중부벽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버트레스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건물외부에 또 다른 버트레스를 나란히 세웠고 또 비스듬히 플라잉 버트레스를 세워 구조의 약함을 보강하였다. 그 결과 외부늑골의 수직효과를 강조하게 되고 더욱 종교적인 정신성을 표출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첨형아치와 공중부벽으로 쓸모없게 된 외벽을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한다. 이로서 돌과 유리로 완성된 성당의 황홀한 구조는 이전의 로마네스크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인간을 압도하고 천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기독교의 또 다른 초월의 세계의 신비감을 하늘의 영광을 느끼게 한다. 높은 천장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간의 무게를 느끼게 하였고 하나님의 신성한 공간에 엄숙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보다 더 엄격한 구성으로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했고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건축에 옮겨 중세 교회 건축양식을 대성했다.  창이 높아지며 채광(採光)을 풍부하게 하고, 전체로서 상승효과를 강하게 나타내어, 세련된 건축기술을 과시하는 레요낭 양식(rayonnant style)이 퍼졌다. 14~15세기에는 후기 고딕 성당들이 건축되었고, 창의 디자인은 물결 모양을 이어 불꽃 모양을 나타내는 플랑브와이앙 양식(flamboyant style)이 유행하여 도시계획에 많이 사용되었다.


바로크(baroque)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바로크(baroque)>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나 에스파냐어에서 <비뚤어진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곡선을 많이 사용한 장식과잉의 이 양식을 <불규칙한> <그로테스크한>이라는 부정적이거나 모멸적인 의미로 부르는 데 사용하였다. 마니에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왕권의 번영과 함께 등장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   동시에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강력한 국가였다. 그 결과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바로크를 <루이 14세의 양식>이라고 한정하여 부르는 일도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적 건축으로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해 건립된 베르사유궁의 대조영(大造營)을 들 수 있다.


18세기 로코코(Rococo) 미술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섬세하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미술을 말하며, 바로크의 지적인 미감보다는 감각적인 관능을 중시하게 되었다.

17세기의 바로크 미술과 18세기 후반의 신고전주의 미술 사이에 유행한 유럽의 미술양식. 프랑스를 중심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도 퍼져나갔다.

로코코라는 말은 프랑스어의 로카유(rocaille)에서 유래한다. 본래는 당시 귀족사회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장식양식 내지 공예품에 대하여 쓰인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이 시대의 프랑스 미술, 나아가서는 유럽미술 전반에 걸친 양식개념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 어원에서 오는 조소적(嘲笑的)인 의미는 불식되고, 독자적인 형식감정과 이에 부응하는 창조적이며 자율적인 가치를 가진 미술양식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로코코는 그에 앞서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부정형(不定形)이나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및 변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 따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는데, 다시 말하면 바로크가 남성적․의지적(意志的)임에 비하여 로코코는 여성적․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서양의 건축 양식
글쓴이 : 원주 원글보기
메모 : 유럽여행을 하다가 다 잊혀진 건축양식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드네여~~ 조은 글 스크랩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