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기위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소피아 왕비 미술관(Centro de Arte Reina Sofia)..
현대적인 건물로 밖이 훤이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멋지다..꼭대기층까지 올라가니
전망이 좋다..
피카소. 달리. 미로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 절대 금지..
그 유명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눈으로 가슴으로만 찍어 담았다..
이 곳 미술관에서 20여명씩 무리지은 서너팀의 일본 관광객도 만났다..
일본인들이 스페인 관광을 마니 즐긴다는데 아마도 피카소를 만나러 이 곳을 찾기
때문일까???
하긴 <게르니카> 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역설하고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게르니카..찐한 감동으로 다가와 카페에 있던 글을 여기 퍼온다...
영화를 조하하지 않더라도 헤밍웨이의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기억하실 겁니다. 1930년대 후반의 스페인 내란을 주제로 한 이 소설과 영화에서 우리는 전쟁의 참화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때는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북부 지방에 있는 비스케이(Biscay) 만 근처에 있는 게르니카(Guernica)라는 작은 마을에는 갑작스럽게 독일의 전투기들이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평화롭기만 하던 이 무방비 도시는 삽시간에 나치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마굿간의 소들은 울부짖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독일군의 폭격 아래서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아 날의 폭격으로 645명이 죽고 889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본래 이곳 게르니카의 부족들은 순수한 스페인 민족이 아닌 바스크(Basque) 족으로서 스페인 정부에 대한 독립 투쟁을 전개해 오던 중이었고 산악 전투에는 능한 사람들이었으나 적의 공습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비록 바스크족이 소수 민족이었다고는 하지만 게르니카의 비극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평화 애호가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스페인 화단(畵壇)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이미 구라파에서 그 명성을 떨치던 파블로 피카소(P. Picaso)는 독일군의 만행에 격노했습니다.
웅변가도 아니요, 문필가도 아닌 피카소는 당시의 비극을 화폭에 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피카소 일생 일대의 걸작인 [게르니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너비가 782.5cm이고 높이가 351cm인 이 대작에는 육신이 찢겨진 마소(馬牛)와 나뒹구는 인간의 시체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듯 널려 있습니다. 이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란과 독일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에 있어서 그 어떤 글이나 웅변보다도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2년 뒤에 피카소는 고국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국을 떠나면서도 이 그림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 후 이 그림을 미국에 기증하면서, "나의 조국에 자유가 찾아오면 이 그림을 스페인에 돌려주어야 한다." 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F. Franco)가 죽고 민간 정부가 수립되자 스페인 사람들은 이제 스페인에도 자유가 찾아왔으니 피카소의 유언대로 그림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여 1992년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서 나와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으로..
(Museo del Prado)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왕립미술관으로 만들어졌다.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6천여점 작품이 전시돼있다. 특히 스페인의 대화가인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공원같은 미술관 앞 거리...
벨라스케스의 "궁정의 시녀들"
필리페 4세의 개인 사무실에 걸려 있을 만큼 그가 아꼈던 이 그림은 필리페 4세와
그의 가족들의 초상을 그린 작품으로, 실내 묘사, 자화상, 집단 초상화, 화실의 화가
등이 하나의 그림으로 담겨져 있다.
죽은 왕자의 침실에서 벨라스케스 자신이 왼쪽 뒤에서 붓을 들고 화폭에 공주 주위의
환경을 담고 있다. 펠리페 4세와 마리아 사이에 난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는 가는 허리에
넓게 퍼진 푸른 스커트로 치장하고, 화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녀 옆에서 하녀는 무릎을 꿇고 먹을 것을 권하면서 공주를 달래고 있지만 거절당한다.
난쟁이 시녀가 개를 발로 건드리며 재롱도 부리고 공주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 때 필리페 4세 왕과 왕비가 그 곳에 들어온다...그림 중앙 뒤편의 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친다. 그것을 본 공주뒤의 시녀는 무릎을 조금 굽혀 인사를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비서인듯한 사람 둘은 뭔가 열심히 잡담중이다. 문가엔 시녀인듯한 한 사람이 서있고...
팔레트에 붓을 찍고 있는 화가가 전면에 캔버스와 원근법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곳에 서 있는데,
훈장이 박혀 있는 의상을 입어 자신이 궁정화가임을 은근히 자랑했다고...
이것도 벨라스케스 작품...
벨레스케스의 "사냥꾼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
고야의 "아들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n)"
사투르누스는 ‘씨를 뿌리는 자’라는 뜻으로 로마인은 그를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에
해당한다. 그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 태어나지만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거시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지고 자신의 누이 레아를 아내로 맞아
부친살해 죄의식과 자신도 자식들로부터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들을 낳는 족족
집어 삼켰다.
물론 자신도 나중에는 자기의 아들 제우스에게 당하지만...
원래 신화에선 자신의 아들을 집어삼켜 뱃속에 살아 있는데, 여기서는 자식을 뜯어
먹는다.
머리와 오른팔은 벌써 뜯어 먹었다~~헉;;
고야의 "옷을 입은 마야"
"옷을 벗은 마야"
고야( Francisco de Goya 1846- 1828) 는 16세때 화가로 로코코 양식의 걸작을 남긴
스페인 거장화가.. 그는 베토벤처럼 46세에 귀머거리가 된 이후에 절정기의 작품을 남긴다.
"옷을 벗은 마야"는 "옷을 입은 마야"를 그리 후에 모델이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다시 그린것.
이 그림은 서양의 최초 누드화이다. 그 이전에도 누드화는 있었지만...성서이야기나
신화속 주인공들 정도..실존 인물을 상대로 누드를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당시 권세를 누리든 알바공작의 부인이란게 정설이다.
이것은 미술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스페인 자체에서도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어
알바공작 부인이 죽은지 20년만에 그녀의 무덤을 파헤쳐 얼굴의 골격이 같네 틀리네 하면서
7년간의 재판이 열리기까지 하였다니...
한편 스페인 재상인 "마누엘 고도이"가 좋아한 애인 "페피타 츠도우"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모델의 얼굴이 그림의 소유자인 고도이의 애인 "츠도우"를 닮아있다는 점 때문에..
고도이의 의뢰로 고야가 그의 애인의 누드를 그려주었고, 고도이는 그림의 앞쪽은
옷입은 마야로, 뒤쪽은 옷벗은 마야로 붙여놓고, 한쪽을 툭 치면 그림이 뒤로 돌면서
손님이 오면 옷입은 장면을, 혼자서는 옷을 벗은 장면을 즐겼답니다.
옷을 벗은 마야는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당하고도 도도합니다.
당시 고야도 시대적 상상을 초월한 위인이지만 모델 역시 대단한 의식의 소유자란 생각이 든다.
미술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젓가슴이 옆으로 누워있음에도 좌우가 다른 방향으로 위치해있고,
그녀의 목은 마치 몸체와 머리를 따로 그려 이어붙인것 처럼 부자연스럽단다..
대화가인 고야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고, 또 구도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지만,
그는 그림에서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남겼답니다,
일부 미술사가들은 원래 공작부인을 그렸다가 문제가 되자 얼굴만 "츠도우"의 얼굴로 고쳐 그렸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기하고 있지만, 스페인의 혁명의 시대에 주류에 당당히 저항하고, 굽히지 않았던 고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네여~~
자세한 감상을 하기위해 그림을 떼어 왔습네다...ㅎㅎ
고야의 마야 앞에 운집한 사람들...
역시 명화는 사람을 부릅니다...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너무나 사실적이라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진인줄 알았다.
고야의 자화상..
루벤스의 "미의 세여신"
글쎄...미의 여신치고는 몸매들이 영~~그렇습니다..
루벤스의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카를로스 4세 초상화..
엘 그레코의 "성 삼위일체"
오래 서서 걷다 서다 반복하니 애들은 그저 지친 모양이다.
밖에 나와 점심을...싸늘한 날씨였는데도 햄 한쪼각 치즈 한덩이로 엄마가 만들어준
빵 한조각을 맛있게 먹어준 애들이 고맙다..
그것도 점심이라고 먹고나니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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